“똑똑, 제가 이 선을 넘어도 될까요?”
나의 욕구와 감정에 귀 기울이며 타인과 관계 맺는 방법
버스에서 마음대로 창문을 열어도 될까? 친구의 사진을 나의 SNS에 올려도 괜찮을까? 사귀는 사람이 몰래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 같아 의심스러울 때 그의 휴대폰을 뒤져 보아도 될까? 같이 길을 걷다 상대가 엉뚱한 방향으로 갈 때 손목을 잡아 내 쪽으로 이끈다면? 이러한 행동은 모두 타인의 경계를 침범한 행동이다. 주변 사람과 상대에게 그 행동에 동의하는지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경계는 크게 물리적 경계(신체, 공간, 소유)와 심리적 경계(언어적·정서적, 사생활)로 나뉜다. 신체적 경계는 모든 경계의 기초로, 몸을 둘러싼 경계이다. 타인의 몸 전체는 함부로 만져서는 안 되는 영역이다. 공간적 경계는 내 방, 내 책상 등 사적 공간을 둘러싼 경계이며, 소유의 경계는 손에 잡히는 물건과 더불어 저작권, 초상권 등을 포함한다. 언어적·정서적 경계는 불안이나 위협, 불쾌감이나 굴욕감을 느끼게 하는 경우이며, 사생활의 경계는 학교 성적이라든가 연애하는 사람 유무 등 사생활을 캐묻고 간섭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경계를 넘고자 할 때는 반드시 동의 구하기 과정을 거쳐야 한다. 친밀도(낯선 사람, 가족, 연인, 친구)와 수평적(친구, 형제자매 사이)·수직적 관계(부모와 자녀, 회사 대표와 직원)와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서로가 서로에게 지켜야 하는 인간관계의 기초이다.
어디까지 선을 그을지, 누구에게 얼마만큼 허락할지 등 동의와 거절의 기준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바로 나 자신이 결정한다. 나의 욕구와 감정을 잘 이해하고, 원하지 않는 것은 단호하게 거절해야 한다. 또한 거절당했을 때는 상대가 거절한 것은 내가 아니라 나의 제안이라는 점을 인식하고 왜곡 없이 받아들여야 한다. 존중받고 싶다면 먼저 타인의 경계를 존중해야 한다.
동의 구하기 다섯 가지 원칙, 확·깨·자·매·번!
‘No Means No’를 넘어 ‘Yes Means Yes’로 나아가야 할 때
저자는 동의 구하기의 다섯 가지 원칙을 확·깨·자·매·번이라고 정리한다. 확실하고 분명한 동의, 깨어 있는 상태, 자유로운 상태, 매번 동의 구하기, 번복할 권리의 보장이 그것이다. 어제 키스했다고 오늘도 하고 싶지는 않을 수 있으며, 침대에 함께 누웠다고 성관계까지 하겠다고 동의한 것은 아니다. 협박당하거나 술에 취해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서 한 동의는 진짜 동의가 아니며, 머뭇거림 역시 명백한 동의가 아니다.
어릴 때부터 경계를 지키고 존중하는 법을 익히면 하고 싶지 않은 상대방의 요구를 잘 거절할 수 있고 나아가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 누군가 내 몸과 관련된 직간접적 행위를 할 때 늘 상대로부터 동의를 요청받아 온 사람이라면 평소와 다른 이상한 상황에 놓였을 때 위험을 빠르게 인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에서는 성교육에서 경계 존중과 동의 교육을 강화하여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법을 익히도록 의무화했다. 유네스코는 이를 일컬어 ‘포괄적 성교육’이라 부른다.
영국은 2020년 9월부터 성교육을 바꿨어요. 기존 성교육에 ‘관계 맺기’ 교육을 강화해 가르치고 있어요. 이를 ‘관계와 성교육(RSE, Relationships and Sex Education)’이라고 부른답니다. 초등학생은 열한 살까지 ‘관계 맺기’ 수업에서 가정, 학교, 놀이터 등 생활 공간에서 자기 경계를 지키고 타인의 경계를 존중하는 법을 배워요. 중등학생은 열여섯 살까지 성적 동의를 배워요. 성적 관계에서 상대방의 의사를 존중하고 자기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능력을 익히죠. 오스트레일리아 역시 경계 존중 교육(Respectful Relationships Education)과 동의 교육을 의무화했어요. 유네스코는 이런 성교육을 ‘포괄적 성교육’이라고 부르며, 「국제 성교육 가이드」를 발간하여 많은 나라에 이런 교육을 적극적으로 권장하고 있어요. - 66-67쪽
동의하는지 물었을 때 만약 침묵이나 무반응, 어색한 미소를 짓는다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럴 때 저자는 고민하지 말고 무조건 ‘거절’로 이해하라고 말한다. 일부 유럽 국가는 강간죄 처벌에서 ‘No Means No(아니오라고 하면 아니오)’ 룰을 도입했다. 상대가 분명하게 거절 의사를 밝혔다면 모든 행동을 즉각 멈춰야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오늘날 성교육은 ‘Yes Means Yes(예라고 말해야 예)’를 강조한다. 명확하고 적극적인 동의만을 진짜 동의로 보고, 침묵이나 머뭇거림 등은 거절로 간주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의 여부를 성폭력 판단 기준으로 삼는 것은 거스를 수 없는 세계적 흐름이 되었다. 저자는 특히 연인 간 스킨십에 있어 매번 동의를 구하는 일은 결코 ‘지질한’ 태도가 아니며, 도리어 상대를 섬세하게 헤아리는 일이라고 말한다.
스토킹, 데이트 폭력은 모두 경계 침범 행위다
좀 더 빨리 알수록 좋은 청소년 시민의 기초 교양
경계 존중과 동의 구하기 과정은 왜 이토록 중요할까? 일상에서 경계를 침범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스토킹, 성추행, 성희롱, 데이트 폭력 등 성폭력을 예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성폭력 생각해 보기」라는 별면에서 성적 자기 결정권과 성폭력을 한층 더 깊이 다루는 이 책은 학교 현장에서는 좀처럼 접하기 힘들었던, 그러나 꼭 알아 두면 좋은 방향의 성교육이라 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과 타인의 성적 자기 결정권을 동등하게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설파하며, 청소년이 건강한 성 가치관을 형성하고, 성에 대한 주체적 태도를 갖고 책임감 있는 성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다. 또한 분별력을 지닌 시민으로서 성적 자기 결정권을 신중하게 행사할 수 있도록 정확한 정보를 제공한다. 청소년에게 성적 자기 결정권을 가르치면 이른 나이에 성행위를 하게 된다고 오해하는 어른들이 있는데, 저자는 권리를 아는 것과 행사하는 것은 별개 문제라고 밝힌다.
성적 자기 결정권은 두 축으로 구성돼요. 첫째로, 원하지 않는 성적 행위를 분명하게 거부하고 저항할 수 있는 소극적 자유가 있어요. 여기에는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 때문에 성적 모욕감이나 불쾌감을 느낀 경우 이에 대해 확실히 반대 의사를 표현하는 것이 포함돼요. 둘째로, 자신의 성적 욕망을 자유롭게 실현하는 적극적 자유가 있어요. 소극적 자유를 위해서는 원하지 않는 행위를 당당히 거부할 수 있어야 하고, 적극적 자유를 위해서는 나의 욕망을 알고 이를 떳떳이 밝힐 수 있어야 해요. 스킨십에 대해 상대와 자유롭게 의견을 나누고 서로의 의사를 존중해야 해요. - 23쪽
대화하는 상대가 지나치게 옆에 가까이 다가왔을 때 혹은 어떤 말을 들었을 때 미묘하게 불편함을 느꼈지만, ‘내가 너무 예민한가’ 하고 그 이유를 뾰족하게 이야기할 수 없던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그 원인과 답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동의와 거절, 경계 존중, 성 역할 고정 관념, 성인지 감수성 등에 관하여 종합적으로 사고하고자 하는 청소년, 학부모, 교사 모두에게 이 책은 훌륭한 길잡이가 되어 줄 것이다.